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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경제

일본 혐한의 뿌리 '조선멸시관' 그 충격적 실체

by 미스터똘프 2020.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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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저토록 한국에 무례할까?
근원 찾아보니 소름돋는 충격적인 실체

일본을 절대 믿어서는 안되는 이유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일간 갈등이 국민감정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수많은 일제의 일상속 잔재들의 공존에 놀랐고

 

7월은 이제 우리 국민들이 '불매운동'을 시작으로 일상에서부터 적대적
친일 세력을 대청소하는 <일제 말살의 해>로 여길법한 해였습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나 라고 하신다면 아닙니다 설상 다시 교역이
활발해지더라도 일본은 영원한 경계 대상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조선멸시관' 사상

여러분은 "조선멸시관" 이라는 사상이 일본 정부와 극우들에게 뿌리깊이
내재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최근 한중일 정상회담 때도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발언하는데 갑자기
일본 관계자 한놈이 한국 기자들을 향해 언성을 높이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한마디로 황당한 경우였지만 우리나라는 묵묵히 이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일본의 이런 무례함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닙니다만 참 어처구니가 없는데요

국내 역사가들은 이들 일본의 집단적 위선과 그 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름돋는 역사적 기록과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어서 공유해 볼까 합니다

 

이야기는 고려 말 등장한 무로마치 막부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1336년~1573년까지 240년간 일본을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전이고 오늘날로부터는 대략 450년전인데요

당시 정치적인 상황은 조선과 일본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사대적 외교를,
조선과 일본은 상호 사신을 보내며 교린적 외교를 하던 시대였습니다

즉 조선은 <사대교린외교>, 큰 나라에 대해서는 사대하기를 정성으로 하고
명나라에 조공하는 나라(일본)에 대해서는 신의 외교가 시작된 시대였습니다

조선이 일본과 교린외교를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왜구의 잦은 침략과 노략질을
방지하려는 데 있었고 당시는 왜구들의 침탈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습니다

일본 본토 또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사대적인 외교를 취했던 이유도
콘트롤 안되는 "왜구"에 대한 관리와 소탕이 하나의 명분이었다는 것인데

조선 1441년 태종 때 형조에서 올린 상소문의 기록을 보면
부산쪽 해안지방에 수도없이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왜구에 대해서

<...굽실거리면서도 이익을 탐하는데 부끄러움이 없어..>

관직 제공, 귀화 장려, 생활대책 알선 등등 평화적인 교섭자로 전환시키려 했으나
무역을 허락하니 복종하듯 굽실거리면서도 이익을 탐하는데 부끄러움이 없어

침탈은 여전하고 표독한 짓을 자행하여 칼로 조선 백성을 상하게 하고 재물을
약탈하니 등 왜구의 근본 모습에 대해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러나는 일본의 실체

그러나 여기에서 눈여겨 볼 일본의 실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1426년 조선은 결국 쓰시마(대마도)를 정벌하고 교역을 완전히 중단했는데

이때 일본 본토 정부에서 중단된 교역을 열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것이고
다시 또 1510년 왜구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켜 교역을 중단했는데

이후 1592년 일본은 조선땅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7년 동안 1599년까지 길고 긴 조선땅에서의 장기 전란이었던 것인데요

10년후 1609년 일본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다는 국서까지 위조해 가면서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다시 중단됐던 조선과의 외교를 재개하게 됩니다

 

임진왜란후 조선 정부는 백성들의 대일 적개심이 극도에 달하는 상황이었고
임금이 있는 한양까지의 진입로 정보를 우려해 부산항만 열어주게 했습니다

조선은 당연히 매우 절제된 최소한의 외교정책으로 통신사를 통해 교류했지만
일본 정부는 500명 남짓한 조선 통신사를 위해 엄청난 예우를 했는데

일본이 쓰시마섬으로 마중을 보낸 일본인의 규모는 무려 1400척의 배에
1만 명이나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 에도에서 하루 사용한 식량은 쌀 20섬, 된장 5말, 소금 5말,
비둘기 100마리, 농어 400마리, 양갱 50상자, 가다랭이 1000마리, 전복 200근,
무 2000개, 송이버섯 100개, 꼬치고기 500마리, 시루떡 100근 등등이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접대한 것인데요 특히 이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집권 초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인 과시였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자국민도 속이는 대사기극

그런데 여기에서 기가막힌 사실은 조선 침략에 대한 보복의 두려움을
불식시키기 위한 우호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자국 국민들에게 조선사절단의 방문을 일본에 복속하는 형태로
조공을 바치러 온 사절로 인식시켰다는 것입니다

즉, 조선의 교린 외교를 대국민 사기극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입니다

급기야 1788년 일본은 사절단의 접대비용을 절약한다는 명목으로 사절단을
일본 정부가 위치한 에도와 오사카가 아닌 쓰시마로 변경합니다

사실은 일본 봉건제 와해로 인해 막부의 재정난이 심각해진 것이 문제인데
일본 정부는 애초부터 <조선멸시관>을 합리화하는 사기 행각을 벌여왔다는 것

이것은 역사적으로 <정한론>의 시작이라고 역사가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유신>의 사상에는 기본적으로 조선을 반드시
정벌해야 대상이고 그것이 곧 대륙으로 나아가 일본이 살 길이다 라는 것입니다

나카이 치쿠잔의 글을 보면 <조선멸시관>에 대한 내용이 잘 나오고 있으며
이 주장은 일본 정부에 건의 됐다고 합니다 핵심만 요약하자면,

천년이나 일본의 속국이었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접할
필요는 없으며 조선의 문화적 우월감을 없애기 위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라는 내용은 일본이 거짓으로 날조한 역사서
<일본서기>를 근거로 제시한 것이죠

 

본래 거짓 그 자체가 왜놈들의 근본

이렇듯 조선을 멸시하는 일본의 태도는 18세기 <조선멸시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이미 500년전 14세기 무로마치 막부시대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음

'왜놈'이나 일본 본토 놈들이나 똑같은 족속들인데 해적질하는 왜놈들 관리를
명분으로 외교도 하고 자국민들도 속이는 정치적 행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익을 위해서는 앞에서는 굽실거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부끄러움 없이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의 실체는 이미 500년 훨씬 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으로

한국을 멸시하는 현 일본 정부나 극우들의 태도는 어떤 특별한 납득한 만한 사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래 이들의 근성과 기질이 기회주의적이고 약탈적이라는 것입니다


지난해 7월 징영공 문제로 시작된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며칠전 한중일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부의 외교 행태는 여전히 무례하고 교활하다 볼 수 있습니다

향후에도 한일 간 갈등은 계속될 것이고 대화의 필요성을 언급한 일본 정부의
태도 자체는 양국 간 불확성을 완화하는 기조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천년 동안 일본의 약탈적 기질과 자국민도 속이는 사기적 행각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한 정부와 국민들의 대응과 대처가 필요한 상황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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