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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경제

거북선의 진짜 의미, 대승후 피폐해진 조선!

by 미스터똘프 2020.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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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거북선 때문에 왜놈을 물리친 것 아니다

거북선 신화는 일본에 의해 먼저 신화화 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하면 어릴적부터 최근 영화에 이르기까지 거북선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마치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거북선 때문에 승리한 것처럼 단순하게 회자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거북선의 외형 또한 실제 역사적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과 영화에는 없는 거북선 역사와 거북선 신화에 대해 정리해 봅니다

몇몇 학자들도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거북선의 모습은 1795년(정조19) 규장각의 윤행임과 유득공이 엮은 '이충무공전서'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는 임진왜란 2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정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장군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편찬토록 했습니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두 가지 거북선 그림이나 설명문(귀선지제)은
정조가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그려진 상징적인 거북선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당시 실제 거북선 설계와 관련한 어떠한 자료도 전해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국내 모형들은 모두 100%맞다고 볼 수 없습니다

 

거북선 모습은 장착된 양쪽 화포들의 화력 등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최근 과학기술연합대학교(UST) 채연석 교수의 거북선 연구결과(2018)에 따르면 함포의 배치를 중심으로 거북선 구조를 연구해 이상적인 배치를 해본 결과 현재 복원한 거북선들은 모두 화포사용이 불가능한 구조로 밝혀졌습니다

 

채 교수의 연구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3주가 지난 1592년 6월14일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를 참고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장군은 '일찍부터 오랑캐의 침노를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거북선)을 만들었고 이번 싸움에 돌격장으로 하여금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들어가 천자포, 지자포, 현자포, 황자포 등 각종 총통을 쏘게 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즉 이 포들이 실제 운용되려면 거북선은 최소 3층 구조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머리에서는 화염이 아닌 현자총통이 설치돼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지름 3cm의 쇠구슬을 발포할 수 있고 2층 좌우에는 지름 2cm의 쇠구슬 탄환 수십개가 한번에 1km이상 발포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여수나 통영에 복원된 거북선에는 황자총통 12기가 설치돼야 하지만 포와 노가 함께 설치돼 그 좁은 공간과 안전을 고려할 때 비과학적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연합대학교 무기전문가 채연석 교수

채 교수는 현재 복원된 거북선에서 화포를 발사해 보면서 충격을 흡수하면서 큰 충격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선체 실험 등을 거쳐 본다면 임진왜란 당시 원형에 가장 가장 가까운 실제의 거북선을 복원할 수 있다며 아쉬움을 전했습니다

 

역사적 기록상 귀선(거북선)이라는 분명한 이름이 등장한 것은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조선왕조실록 즉 태종실록입니다 그리고 이미 거북선의 등장 기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0년 전 고려건국 초기 제8대 현종 원년(1008년)부터 제15대 숙종 3년(1098년) 때였습니다 여진 해적과 왜구 섬멸에 주력으로 사용됐던 이때 전선은 배의 좌우에 창과 칼을 꽂아 배에 못오르게 했고 선두에 쇠뿔을 달아 적선을 충파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후기에도 구전이긴 하지만 배의 상갑판을 거북이 등처럼 복개한 '별맹선'이 전해지고 있어 그 형태가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보낸 장계

세계적인 선박기술을 보유한 한국의 전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태종 13년 1413년 2월 5일 임진강에서 대마도 정벌을 위한 진법 훈련때 건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거북선과 가상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관전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임진왜란 발발 180년 전 조선초기에 거북선의 존재는 확실하며 고려말 창왕 원년 1388년, 경상도 원수 박위 장군과 최무선 장군이 전선 100척을 몰고 대마도를 정벌할 때 거북선이 건조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거북선 건조 계기를 역사적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왜구의 침탈이 극심했던 조선 중종 때부터 명종 때에 평선을 사용하던 왜구가 옥선으로 침범하자 조선도 맹선으로는 이를 대적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13대 임금 명종10년(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난 바로 그 해 새로운 '판옥선'을 개발했고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전선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시대 주력 전선 '판옥선'

이 때 이순신 장군은 큰 전쟁이 곧 터질 것을 직감하고 왜적의 접근전을 대비해서 '판옥선'을 모체로 고려시대 '별맹선'의 장점을 결합해 <거북선>을 개발했던 것입니다 거북선이 처음 전투에 참가한 것은 이순신 함대의 2차 출전중 첫 해전인 사천해전(1592년 5월29일)으로 기록돼 있지만 전문가 중에는 전쟁 초부터라고 예측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임금의 윤허를 받지 않고 비밀리에 건조한 전선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공을 세울때까지 거북선의 참전을 보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즉 왜군들이 큰 전쟁을 일으키기 전 조선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 수차례 작은 해전을 도발했을 것이고 이 때마다 거북선이 대응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실제로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선은 '판옥선'이었고 원균 장군이 칠전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할 때 거북선은 특별한 역할이 없었습니다 원균 장군이 칠전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할 때 거북선은 이미 그 전에 모두 격침됐고 이후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거북선에 대한 출전 기록은 없습니다

 

일본에서 먼저 시작된 '거북선 신비화'

 

2014년 관객수 1700만명을 기록했던 영화 '명량해전(1597)'과는 달리 실제로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은 거북선 없이 12(13)척 만으로 왜군 133척의 적함 중 31척을 격침해서 대승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도 거북선 없이 대승을 거두자 이후 왜구측에서 역설적이게도 '거북선'에 대한 신비화가 먼저 일었다고 합니다 오랜기간 연이은 해전속에서 기괴한 모습을 한 거북선의 신출귀몰한 공격형태는 '이순신'이라는 명장의 소문과 함께 강한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거북선의 가치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수군의 신무기로써 돌격전을 감행하여 적진을 혼란스럽게 하고 공포심을 유발하는 조선수군의 고도의 지략에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오랜 내분속에 별반 지원도 못받고 되레 유배까지 당한 한명의 노장과 백성들이 일궈 낸 8년여의 임진왜란 승리는 불과 550년전 우리 민족이 격은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까지 거북선이 국난을 타개한 민족의 자긍심이자
대표적인 상징물로써 이순신 장군과 함께 대대로 전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임진왜란 승리 이후

 

오랜 평화시기 국방 문제에 소홀했던 조선은 일본에게 대규모의 침략을 당한 당시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대승을 거두었으나 오랜 전쟁의 휴유증을 극심하게 겪어야 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군사력이 최고조인 때였고 조선은 매우 취약해 이순신 장군의 존재와 활약은 사실상 나라를 구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종전 후 조선의 인구는 일본군이 숱한 살상으로 급격히 줄었다고 하며 먹을 양식이 없어 인육을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임금이 전쟁 때 도망한 것을 덮으려고 전쟁의 영웅을 꼬투리를 잡아 벌하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더 강화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일본에 의해 수많은 문화재와 노비문서, 토지대장 등 나라의 근건이 되는 중요 문서들이 상당수 불타없어져 조선의 신분제와 세금 등이 와해돼 전쟁 후의 복구와 재정을 정비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반면 일본은 전쟁에 패했을 뿐 조선의 우수한 문물과 성리학자, 인쇄공, 도공 등 문화를 약탈해 감으로써 문화발전은 물론 조선의 문화재 유물에 재팬 마크를 붙여 유럽 상인들과 거래하며 막대한 부를 챙기고 신항로를 개척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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